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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 문명과 기후 변화

by 블로그노트1 2025. 10. 6.

1. 번성하던 인더스 문명, 기후의 균형 위에 세워진 도시 국가들

 

고대 인더스 문명은 약 기원전 2600년경부터 기원전 1900년경까지 오늘날의 파키스탄 남부와 인도 북서부 일대, 인더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문명이다. 하라파와 모헨조다로를 대표로 하는 이 문명은 고도로 계획된 도시 구조, 정교한 배수 시설, 그리고 규칙적인 도시 설계로 유명하다. 인더스 문명은 단순한 농경 사회를 넘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청결한 도시 환경을 갖춘 문명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의 기반에는 무엇보다도 ‘기후의 안정성’이 존재했다. 인더스 문명의 번성은 인더스 강과 그 지류들이 가져다주는 풍부한 수자원, 그리고 주기적인 몬순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인더스 문명 초기에는 인더스 강 유역과 사라스와티 강 유역에 비옥한 토지가 펼쳐져 있었다. 계절마다 일정한 강수량이 확보되었고, 홍수는 농업에 필요한 토양 영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기후적 안정성이 곡물 재배, 특히 밀과 보리 생산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 결과 도시들은 잉여 생산물을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인더스의 주민들은 단순히 농경만이 아니라, 교역과 수공업, 청동기 제작 등 복합적인 경제 활동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 안정된 기후는 영원하지 않았다. 약 기원전 2200년경, 기후학적 변동이 시작되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인도 아대륙에 이르는 ‘메가 가뭄’이 지구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고기후 연구에서는 이 시기를 ‘4.2킬로년 이벤트’라 부르며, 인류 문명사 전반에 큰 전환점을 가져온 사건으로 평가한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허 문명 등 주요 문명권이 이 시기에 동시에 큰 위기를 겪었다. 인더스 문명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기후 변화는 단순히 비의 양이 줄어드는 문제가 아니었다. 인더스 강의 유량이 불규칙해지면서, 기존의 농경 패턴이 붕괴되었다. 강의 범람이 약해지거나 혹은 예측할 수 없게 변하자, 농업 기반이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이는 도시 생태계 전체를 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대규모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없게 되자 교역망이 끊어지고, 도시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인더스 문명과 기후 변화
인더스 문명과 기후 변화

2. 인더스 강 유역의 건조화와 농업 붕괴 – 풍요의 땅이 사막으로 변하다

 

기후학자와 고고학자들의 협력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인더스 문명의 중심지는 점차 북쪽의 펀자브 평원에서 남쪽의 건조지대로 이동했다. 그 원인은 바로 ‘강의 건조화’였다. 한때 인더스 문명의 중심지로 여겨졌던 사라스와티 강(현대의 가가르-하크라 강)은 점차 수량을 잃어, 결국 완전히 말라버렸다. 인공위성 이미지 분석과 지질학적 조사 결과, 고대의 사라스와티 강은 한때 거대한 수계로 존재했으나, 기후 건조화로 인해 서서히 소멸된 것으로 확인된다.

강의 건조화는 단순히 물의 부족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더스 문명에서 농업은 주기적인 홍수에 의한 충적토의 공급에 의존하고 있었다. 강의 범람이 멈추자, 토양의 비옥도가 급격히 낮아졌고, 가뭄이 이어지면서 수확량은 감소했다. 특히 인더스 지역의 농업은 인공 관개 시스템보다는 자연적인 강의 흐름과 계절성 강우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우 패턴의 변화는 치명적이었다.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유적의 퇴적층에서는 점차적으로 ‘건조 환경에서 형성된 토양층’이 증가하는 양상이 관찰된다. 이는 기후가 점점 더 건조해졌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한편, 인더스 문명의 북부 지역에서는 가뭄을 피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지역에서는 우물이나 저수시설의 흔적이 나타나며, 이는 수자원을 저장하려는 노력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기후 변화의 규모는 너무 컸고, 인위적인 대응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 시기 인더스 문명은 ‘생산의 위기’에 직면했다. 밀과 보리 같은 주곡 작물의 수확이 줄어들자, 인구는 점차 감소했다. 또한 식량 부족은 사회적 불안정으로 이어졌다. 인더스 문명의 특징 중 하나인 ‘비폭력적이고 중앙 권력이 약한 사회 구조’는, 역설적으로 위기 상황에서 체계적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처럼 강력한 통치자나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규모의 관개 사업이나 식량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인더스 문명은 점차 ‘농업의 붕괴 → 도시의 쇠퇴 → 인구의 분산’이라는 경로를 밟으며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3. 도시의 이주와 문명의 해체 – 인더스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인더스 문명과 기후 변화
인더스 문명과 기후 변화

기후 변화로 인해 더 이상 농업이 유지될 수 없게 되자, 인더스 문명의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약 기원전 1900년경 이후의 고고학적 증거는 도시 중심지의 급속한 인구 감소를 보여준다.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같은 대도시는 급속히 비워졌고, 대신 인더스 강 상류나 갠지스 평야 동쪽 지역에 새로운 소규모 정착지가 형성되었다.

이 이동 현상은 단순한 ‘도시의 붕괴’가 아니라, ‘문명의 재편’이라 볼 수 있다. 인더스 사람들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보다 습윤하고 안정적인 지역으로 이동해 생활 양식을 변화시켰다. 예를 들어, 인더스 후기 유적에서는 기존의 벽돌 건축 대신 흙벽돌과 목재를 이용한 소규모 주거지가 늘어났다. 또한 도시 중심의 공공 배수 시설이나 목욕장 등은 사라지고, 자급농 중심의 마을 구조로 바뀌었다. 이는 복잡한 도시 사회가 단순한 농경 사회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기후학적 기록을 보면, 당시 인도 북부 지역에서는 몬순의 경로가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증거가 있다. 즉, 인더스 지역에서는 비가 줄어드는 반면, 갠지스 평야 동쪽에서는 비가 더 많이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기후대 이동은 인류의 거주 중심지 이동을 촉발했으며, 이는 훗날 인도-갠지스 문명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인더스 문명의 ‘몰락’은 단순한 붕괴가 아니라, ‘문명의 변환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

또한 인더스 문명 후기에 등장한 도자기 양식, 언어적 흔적, 농업 기술 등은 후대의 베다 문화로 이어지는 단서를 제공한다. 일부 학자들은 인더스 문명인의 후손들이 북서부 인도에 남아, 초기 인도-아리아 문화와 융합했다고 본다.

이처럼 인더스 문명은 기후 변화라는 자연적 재앙 앞에서 한계를 드러냈지만, 그 유산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도시 계획, 위생 시설, 측량 기술 등은 후대 인도 문명에 영향을 미쳤으며, “기후 변화가 문명을 어떻게 재편할 수 있는가”라는 교훈을 남겼다.